▲ 도 성 희(大記者)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7만여 명이 즉사하고, 부상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로 부터 3일 후에는 나가사키에 2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다. 4만여 명 즉사에, 수 많은 부상자로 이어졌다.

이후 여러 형태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 사망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수십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핵 무기가 실전에 투입된 사례로는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경우로 꼽히고 있다. 이는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전범국가인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일환이었다. 결국 일본 천황은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8월 14일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참전하고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야기한 최악의 전쟁이 막을 내린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70년,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위령비가 세워진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들을 기리는 위령비는 평화공원 외부에 방치된다. 일본의 차별정책과 남북 분단에 따른 재일동포 사회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이를 평화공원 내로 옮길 수 있도록 결 정한 사람이 히라오카 다카시(平岡敬·1927년생) 당시 히로시마 시 장이었다.

그는 1991년 취임 후 ‘식민지 지배와 전쟁으로 아시아 태평양 사 람들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문구를 평화 선언에 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정치인으로서 식민지배에 대 한 첫 공식 사과였다. 재임 중이던 1999년에는 시장 직권 특례 조치 로 한국인 위령비를 평화공원 내로 들임으로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 아준 장본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상호 왕래로, 한국-일본 정상 간 의 셔틀외교가 12년만에 복원됐다. 일본 총리가 국립현충원을 찾 아 허리를 굽힌 것도 12년 만의 일이다. 또한 윤 대통령이 오는 5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 을 계기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를 함께 참배하기로 했다.

여기서 새삼 히라오카 다카시 전 히로시 마 시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자 출 신인 그는1965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게 된 다. 그리고 많은 피폭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놀라기도 했다. 일본에서 는 전혀 듣지 못하다가, 처음 알게 된 일이 었다.

이후 2016년, 경남 합천원폭복지회관 내 위령각에서 제71주기 원폭피해 영령을 위한 추모제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원폭 피폭 영령들을 위해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책임을 분명히하고 식민지 지배와 원폭 피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포함 해 지금도 후유증에 고통받는 피폭자에 대 한 원조가 절실하다"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 다.

그러면서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것 은 미국이지만 일본정부도 원폭에 의한 한 국인의 희생과 고난에 대해 정식으로 사죄 하지 않았다"며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 아래 원자폭탄에 의해 희 생된 한국사람들에게 '평안히 잠드소서'라는 말을 할 입장이 아니 다"고 꼬집기도 했다. 한국-일본,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관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음이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일본에 대한 그와 같은 감정선이 폭넓게 존재한다. 그럼에도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는 동의하는 한국인이 많다. 그런 한편 일본의 여러 석연치 않은 태도 로 인해 경계의 시선을 갖는 것도 숨길 수 없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 내의 왜곡과 억지 주장이 사라져야 한다. 특히 일본 내 극우세력의 망동은 한국인의 가슴을 후벼파는 깊은 상처가 된다.

또한 일부 정치인의 망언도 두 나라 관계를 급랭 시키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동된다.

무엇보다 일본 스스로가 자행한 의도된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오직 진실만이 빛나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동맹 관 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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